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➁ 오두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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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의 격전지
●문화재명: 파주 오두산성(사적 351호)
자유로 문발 IC에서 문산 방면으로 달리다가 헤이리 마을 못 미쳐 왼쪽으로 우뚝 선 봉우리가 있다. 바로 오두산 통일 전망대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이다. 한강 건너로는 김포 땅을 볼 수 있고, 임진강 건너로는 개풍(황해도) 땅을 볼 수 있다. 임진강과 한강이 서로 만나 조강(祖江)이 되는 곳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의 끝이기도 하다. 오두산이 지금은 통일 전망대라는 이름으로 관광지 기능을 하고 있지만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오두산 성벽(문화재청): 위로 올라가면서 돌을 안으로 들여쌓고, 성벽 내부를 돌로 채우는 형태는 백제 성곽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관미성 함락한 고구려 광개토 대왕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은 처음에 백제가 우세하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평양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고구려에 광개토 대왕이 즉위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나의 할아버지 고국원왕께서 백제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셨다. 이제 그 원수를 갚아야 할 때다.”
고구려 광개토 대왕은 즉위한 이듬해에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391년 7월에는 백제의 석현성 등 10여 성을 빼앗고, 같은해 10월에는 관미성을 공격하였다. 관미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로서 함락이 쉽지 않았다.
“폐하, 관미성을 어찌 공격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군사를 7분대로 나누어 관미성을 함락하라.”
광개토 대왕은 백제와 격전을 벌인 끝에 20일 만에 관미성을 함락하였다. 관미성의 함락은 백제의 북쪽 변경 지대가 무너진 것이기 때문에 백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관미성을 회복하려는 백제 아신왕
백제의 아신왕은 외삼촌인 진무에게 병권을 맡기고 복수를 주문하였다.
“그대가 알다시피 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옷깃처럼 중요한 곳이오. 지금 그 땅이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짐은 참으로 애통하구려. 경은 마땅히 마음을 기울여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진무는 아신왕의 명을 받들고 나아가 관미성을 포위하였다. 진무는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지만, 관미성의 지세가 험했기 때문에 함락이 쉽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 선봉은 나의 것이다. 적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말라.”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싸웠다. 그러나 후방에서 군량미를 제때에 보급하지 않아서 관미성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광개토 대왕에게 무릎을 꿇은 백제 아신왕
백제는 그 후 복수를 위해 고구려와 더 싸웠지만, 연이어 패함으로써 결국에는 58성을 고구려에 내주고 말았다. 국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항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백제 아신왕은 고구려 광개토 대왕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대왕 폐하, 오늘 이후로 영원히 폐하의 노객(종과 같은 신하)이 되겠나이다.”
“좋다. 백제의 아신왕은 순응하여 정성을 다하라.”
▲1872년 지방지도(교하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왼쪽 상단을 보면, 조선 후기에서 오두산성이 군사적으로 요충지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호가 생각한 관미성은 오두산성
백제는 관미성과 한강 이남을 고구려에 내준 뒤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격전을 벌인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곳 오두산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인 김정호는 그의 저술 『대동지지』에서 “오두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며, 본래 백제의 관미성이다(烏頭城 臨津漢水會合處 本百濟關彌城)”라고 밝히고 있다. 실재로 삼국시대의 산성 흔적과 백제의 토기 파편이 발굴됨에 따라 백제의 관미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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